[진보의 내일을 찾아서] 진보의 성찰2 ‘영국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2(고세훈) -강연 다시보기-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2

-대처와 대처이후의 제3의 길-

 

고세훈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과 교수)

 

 

 

영국에서의 제3의길

 

오늘은 제3의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3의길이 거의 소멸된 것 아닌가 판단합니다. 토니 블레어가 1997년에 집권해서 노동당이 2010년까지 13년 동안 집권하는데 2007년 블레어정부의 재무상이었고 블레어와도 굉장히 친한 관계였던 고든 브라운이 수상이 됩니다. 그리고 3년 뒤 보수당 캐머런정부에 권력을 내주게 됩니다. 영국에서 재무상은 수석장관으로 통하기 때문에 당연히 브라운에게 정권이 넘어가야 되지만, 83년에 블레어가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미국 CIA가 뒤에서 선거자금, 전략 등을 조정하고 93년에 노동당 당수로 만들고 97년 정권을 잡도록 블레어를 키운 것 아니냐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블레어가 이라크 전쟁 등 미국의 조쉬 부시를 추종하는 정책을 펴는 바람에 수상에서 물러날 때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브라운에게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그리고 브라운은 정권을 잡은 뒤 당연히 블레어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미 제3의길, 소위 신노동당 전략이라는 것이 당의 많은 불신을 받게 된 상태이고 노동당내에서 제3의길과 거리를 두려고 하려 했다는 것이 제가 본 노동당의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났던 금융위기, 이 기간이 정확히 블레어, 브라운의 집권기간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제3의길이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죠. 과거 80년대 노동당 정치에서 우익 정치를 대변했던 로이 헤터슬레이와 같은 사람들조차 나서서 도대체 노동당 사민정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제3의길이 다 망쳐놨다고 비판하며 과거 노동당을 회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2007년에 브라운이 블레어를 계승하고 2010년 선거 패배이후에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사람이 랄프 밀리밴드라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이론가의 아들인 에드워드 밀리밴드입니다. 랄프 밀리밴드에게는 데이빗 밀리밴드라는 장남이 있었는데 둘 다 노동당의 고위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때 데이빗과 에드워드 두 형제가 노동당 당수를 놓고 붙게 되는데 데이빗은 제3의길에 굉장히 밀착했던 사람이었고 에드워드는 그와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제3의길에 비판적이었던 당분위기는 결국 동생인 에드워드를 당수로 선출했습니다. 영국은 최대 5년 동안만 한 정당이 집권 할 수 있고 5년 안에 반드시 의회를 해산해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야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14년 15년에는 새로운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만약 에드워드 밀리밴드가 수상이 되면 제3의길과는 다른 정치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제3의길이 이미 노동당내에서 많은 불신을 받고 있고 국회의원들에게도 도외시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3의길을 우리가 하나의 사상이라고 본다면, 이는 1998년 토니 블레어, 엔소니 기딘스, 1999년에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슈레더 이 두 사람이 쓴 작은 판플릿같은 5000단어로 이루어진 제3의길이라는 소책자에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서 특별한 체계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떤 정신이나 방향을 막연하고 모호하게 주장하는 내용들이며, 정치경제학 같은 것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가디언의 경제에디터였던 밀 허튼이라는 사람은 이 세 권의 책을 보고 “이 책에서는 정치경제학을 발견할 수 없다. 정치경제학 없이는 진보의 사상을 대변할 수 없다.”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제3의길 자체가 공허한 개념이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이 태동하고 발전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제3의길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개괄

이 맥락을 대체로 5가지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3의길이 영국 노동당에서 차지하는 이념적 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이 대처리즘을 상당히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대처리즘에 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클린턴의 민주당과의 관계입니다. 소위 클린턴의 신민주당, 뉴딜정책인데요. 제3의길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 welfare to work, 복지에서 노동으로-일하는 복지라고 번역되는 이것이 클린턴의 workfare(근로복지)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블레어가 제3의길을 주창하기 전에 당내 정책결정과정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바꾼 당내 정치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이것이 공허하고 모호한 만큼 상당한 정도로 선거승리를 위한 생존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에 대처가 퇴진합니다. 1979년에 집권을 해서 83년, 87년 이렇게 대처가 3차례 총선 승리를 이끄는데, 11년 동안 집권하고 퇴진한 후에 대처의 후계자인 존 메이져가 92년 총선승리로 97년까지 집권을 하게 돼 보수당이 18년 동안 집권을 하게 된 것이고 노동당은 연속해서 4차례 총선에서 패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83년 총선 패배 이후로 등장한 우파 수정주의적 노선인 닐 키놉 이라는 당수가 92년 총선패배로 물러나게 되고 존 스미스라는 사람이 92년 노동당 당수가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 계속 노동당 당수였다면 노동당 정치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급진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여러 단체들을 규합해서 노동당을 만들었던, 영국 윤리적 사회주의의 근대적 창시자였던 케어 하디를 계승할만한 사람이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 이 사람이 병으로 2년 만에 죽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94년에 토니 블레어가 당수로 선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3의길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위해 당의 정책과정의 틀을 바꾸게 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바로 당내에서 노조의 지분, 정책결정과정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위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클린턴의 민주당이 1992년에 집권을 하게 됩니다. 80년~88년까지 레이건, 92년까지 시니어 부시가 집권하고 92년에 민주당이 들어서는데, 클리턴 민주당이 자신들을 신민주당이라고 부르고 블레어의 노동당은 자신들을 신노동당으로 부르는 등 클린턴의 민주당과 블레어의 노동당이 굉장히 빈번한 교류들을 합니다. 블레어의 노동당은 클린턴 민주당의 선거전략, 정책들을 학습하고 95년에 전격적으로 노동당이 1918년부터 가지고 왔던, 사회주의 목표를 당의 목표로 내세웠던 유명한 당헌 조항4를 전격적으로 폐지합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를 폐지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했었는데 블레어가 폐지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념으로서의 제3의길

이념적으로 제3의길이 노동당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는데요. 엔서니 기든스와 토니 블레어에 의하면 구좌파와 신우익간의 타협으로 제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우익은 말하자면 대처주의를 말하는 것이고, 구좌파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에틀리 정부에 의해 일련의 국유화, 복지정책의 도입이 실시하는데 5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당 내에서 복지국가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기존의 성과들을 유지하는, 즉 생산은 시장에 맡기고 국가는 분배의 문제에만 개입하는 형태로 사회주의의 목표를 실제적으로 잃게 됩니다. 이때부터 생산의 문제와 분배의 문제가 절연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데요. 즉, 전통적인 사회주의와 완전히 선을 긋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50년대 노동당내에서 이런 문제를 둘러싼 논쟁들이 전개되게 되는데 이것을 수정주의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는 변했기 때문에 구태어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공소유를 취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산은 시장을 맡기고 국가는 조세와 지출을 통한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분배 혹은 재분배를 위한 개입에만 치중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입니다. 이것이 노동당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이었던 것이고, 이것이 노동당의 주류노선이 됩니다.

1956년도에 나온 정치인이면서 뛰어난 학자인 앤서니 크로스랜드가 쓴 ‘the future of socialism’ 를 보면 2차 대전 이후 영국노동당의 대표적 정책기조였던 수정주의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멀리 있는 신화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이고, 생산과 분배의 개념이 절연되고, 생산은 시장에 맡기되 국가는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혼합경제사상이 부상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국유화문제는 거의 죽은 이슈가 됩니다. 조항 4는 분명히 국유화를 당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책적으로는 거의 활용하지 않는 모습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입장이 토니 플레어가 공격한 구좌파입니다. 구좌파는 이미 수정된 좌파인 것이지요. 물론 수정된 좌파의 입장이 노동당 정부의 실천에서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니다. 60년대 말 헤럴드 윌슨 정부 때 파운드 위기, 무역수지 적자 등의 문제로 인해 반노조정책을 펼치면서 노조진영을 이반시키고 상당한 정도로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의 관행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고, 1976년 캘러한 정부때 IMF구제금융을 서방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받게 되면서 케인즈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합니다. 수정주의조차 노동당이 정책실천에 있어서는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80년대 초가 되면 76, 79년 캘러한 정부가 노동당의 노조진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당내 좌파가 노조진영을 과격화시키면서 지도부가 더 이상 배반하지 못하게 당의 정책결정과정을 민주화시켜버립니다. 이후 노동당은 이념을 집권을 통해서 실현하기 보다는 선거기구로 전락하는 포괄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80년대 후반에 오면 미디어 활용을 통한 여론정치가 일상적인 당정치의 요체로 부각하게 됩니다. 물론이지만 여론정치가 부각되면 여론의 추이, 단기적인 추이가 정당의 최대관심이 되면서 정당의 중장기적 정책전망을 세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추세가 80년대 말 블레어가 당수로 되기도 전에 이미 지속되었고, 따라서 90년대 초가 되면 노동당 정치에서는 국유화, 복지국가, 케인즈주의, 핵무기를 영국이 일방적으로 핵해제를 해야한다는 일방주의, 유럽이 자본주의적 세계라는 입장에서 반유럽주의, 노조주의 등이 사실상 당의 공식적인 문건에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블레어가 ‘제3의길이 구좌파와 신우익 간의 타협으로 나온 것이다.’ 라는 것이 굉장히 정치적인 수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블레어가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대처주의가 아니라 당내 구좌파였습니다. 이미 구좌파는 피폐된 상태였는데, 이미 무력화된 허수아비를 거대한 실체로 만들어서 공격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블레어의 제3의길을 우리가 통상 신수정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3의길의 당내 이념화사에서 본 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처주의

두 번째 태동배경에는 대처주의가 있습니다. 대처이후의 영국정치는 대처주의가 만든 정치 경제적 지형위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막중하기 때문에 대처주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대처는 전통적인 영국 보수주의에서 외부자였습니다. 옥스퍼드를 나오긴 했지만 식료품상의 딸이었고 공립인문학교 출신입니다. 이것은 영국 보수당의 당수들, 수상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는 완전히 상이한 모습니다. 보수당의 당수는 1965년까지 선출된 것이 아닙니다. 매직서클이라고 해서 보수당의 원로당수들이 모여 출현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보수당의 당수들은 전통적인 사립학교 출신, 옥스포트-캠브릿지 출신, 귀족이거나 대상공인 출신으로 그 사회경제적 배경이 일치했습니다. 1963~4년 보수당의 더글라스 흄이 노동당의 헤럴드 윌슨에게 패하고 물러나가 되면서 1965년에 당수를 선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됩니다. 말하자면 의회보수당, 보수당 의원들이 당수를 선출하게 되면서 보수당의 권력과정이 민주화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당수가 된 사람이 에드워드 히드라는 사람입니다. 히드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옥스퍼드출신이지만 공립학교 출신입니다. 히드 이후 대처, 대처 이후의 메이져는 고교중퇴자에 곡예곡마단 단장의 아들이었을 정도로 이때부터 당수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출된 당수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변화는 굉장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제 가문에 기대기보다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보수당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보수주의가 아닌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히드가 1965년에 당수가 되면서 당 정책을 온정주의에서 시장자유주의로 전격적으로 이동시킵니다. 1970년에 셀스톤 파크에서 보수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거기서 했던 히드의 셀스톤 연설이 굉장히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후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에 획을 긋는 연설로서 영국 보수당 정치가 전통적인 온정주의에서 시장자유주의로의 회기를 전면적으로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후 합의를 파괴한 최초의 보수당수가 바로 에드워드 히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20년 넘게 지속된 합의정치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어 당내의 반발, 당 외부의 노조운동, 특히 광부노조의 저항으로 인해 히드가 다시 케인즈주의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래서 히드가 물러나고 대처가 당수가 됐을 때 했던 첫마디가 “Ladies is not for turning”이었습니다. 히드는 남자로서 굴복해서 케인즈주의로 다시 선회했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보수당은 히드가 케인즈주의로 다시 선회를 하고 광부파업이 영국전역을 휩쓰는 가운데,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에 임하지만 2차례 노동당 윌슨에게 패합니다. 그러고 나서 1975년 보수당의 당내 정책결정에 현직 당수, 수상이라 할지라도 당내 보수당원들이 원하지 않으면 불러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겨나 또 한번 민주화되면서 1975년에 히드가 보수당 당수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규정에 따라서 애드워드 히드가 현직 당수로는 처음으로 불명예스럽게 당수직을 내놓게 되고 이 과정에서 당수로 선출된 것이 마가렛 대처입니다. 이 새롭게 바뀐 규정은 대처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90년이 되면 마가렛 대처는 현직 수상으로는 최초로 선거,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당내 반발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됩니다.

대처는 70년에 윌슨정부, 74년 히드정부, 79년 캘러한정부의 패배가 노조운동의 반발로 이루어진 사실을 지켜봐온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79년 대처정부가 들어서면서 반노조정책에 굉장히 헌신적으로 임합니다. 노조에 대해서 상당한 적대감을 가진 것이지요. 대처정치를 얘기할 때 합의의 정치가 아닌 소신정치, 신념의 정치로 얘기하는데, 대처가 수상이 되면서 얘기했던 것이 “우리도 그들처럼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주의도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보수주의라는 것이 18세기말, 19세기 초 보수주의의 이론적 태두라고 하는 버크가 “지금 여기의 정치”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이었고 추상적인 도그마, 원리 등을 혐오했습니다. 대처는 소신의 정치, 신념의 정치를 펼치면서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된다는 선언을 통해 히드가 실패했던 전통적 보수주의로부터 이탈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대처리즘에 대해서 5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통화주의, 민영화, 반노조, 반복지,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적 우익 정치가 마지막으로 실천하는 것이 법과 질서의 정치인데 말하자면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양산하기 때문에 그것을 법과 질서로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처는 통화주의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예전에는 합의하에서 완전고용이 주된 정책 목표였는데, 대처정부 하에서는 고용, 실업 이런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지 않으며 주된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이 됩니다. 통화안정, 즉 통화공급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통화량 증가의 상한선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공공예산을 억제하고 균형예산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말이 균형예산이지 이것은 공공지출을 삭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긴축입니다. 이렇게 통화주의에 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에 케인즈이론의 좌파인 칼 도우라는 사람은 “1979년 5월에 그녀가 권좌에 올랐을 때 그녀의 정부는 거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할 때 취했던 것과 같은 엄숙함을 가지고 통화주의적 신조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보수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이고 대처가 중용하다가 나중에는 제외시켰던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이안 길모어라는 사람은 “불행이도 대처의 통화주의는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한 이론으로서 죽음 보다 비참한 운명, 즉 그것이 실천에 옮겨졌다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감세를 진행합니다. 대처가 들어서기 전에 영국의 노동당 정부 하에서 최고 한계세율이 83%였는데 대처정부 하에서 그것이 40%로 낮춰지게 됩니다. 고이자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것이 투자에 영향을 미쳐 고환율이 되고 그래서 대처정부시절에 수출산업과 제조업이 몰락했다고 평가됩니다.

민영화와 관련하여 11년동안 대처효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65만 종업원에 17개 거대산업이 민영화 됩니다. 반노조와 관련해서는 9개에 걸친 반노조 입법을 실시합니다. 대처 재임 시 이미 영국은 서구세계에서 노조의 권력자원을 포함한 모든 집회에서 노조운동이 가장 취약한 나라로 몰락합니다. 그때 삼자개입이 법적으로 금지됐고, 공장폐쇄가 폐지되고, 지도부가 결정했던 파업은 조합원들의 비밀투표를 통해 80%이상 찬성해야 파업에 나설 수 있게 되었고, 파업중에도 조합원들은 얼마든지 단체행동에서 이탈할 수 있게 됐고, 1906년 이후에 영국에서 사라졌던 테프베일판결의 내용, 다시말하면 파업으로 인해 금전적 손실에 대해 사용자가 재소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게 되었으며, 사용자가 노조-단체협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사회주의다.’ 라는 정의할 만큼 반복지주의적 정책이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의 총량적 지출수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지지출의 증가율이 줄어들었지만 총량지출은 꾸준히 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때 복지국가의 정치적 불가역성을 표현하는데 복지가 중산층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쉽게 삭감할 수 없는 모습을 띠게 된다는 것이며, 서구국가들의 정부사이즈가 우리와 비교도 안될 만큼 크기 때문에 복지공여를 위한 관료체계가 비대해져 있으므로 복지국가가 쉽게 후퇴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지속적으로 복지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대처가 복지 총량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기보다는 복지국가의 관한 정신,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복지를 허용하면서도 굉장히 수치스럽게 만드는 가계조사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복지국가에 대한 정신을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추진되면 사회경제적 약자의 고통이 늘어나고 범죄율이 늘어나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정치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이 개입되고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포장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박근혜정부의 내각 각료들의 임명들을 보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법과 질서의 정치를 매우 강력하게 펼 것으로 보여 집니다. 대처가 이러한 내용의 정책을 펴는데 있어 엄청난 당내 반발의 비용을 치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9년에 이어 83년, 87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행운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83년 총선의 경우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훨씬 앞서 있었으나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대처 집권 시에 북해 석유가 터져 나오게 되면서 1천억 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200조원의 재정 수익을 대처가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방대한 국유산업의 매각으로 100조에 달하는 재정수익을 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상 어느 정부도 대처정부처럼 북해 석유와 민영화라는 황금거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라고 평가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대처가 강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동당이 이념논쟁 등으로 내분에 휩싸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유리한 요인들이 대처주의가 갖는 과격성과 당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지속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대처의 정권을 선출된 독재라고 표현되는데 이것 또한 박근혜정부를 연상시키게 됩니다. 정책과정을 거의 공개하지 않고 공식적인 정책과정을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각의 각료회의까지 중시하지 않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측근들을 중심으로 비공식적 정치를 해나갑니다. 각료회의가 시작되면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자기입장을 이야기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무수한 개각이 이루어지는데, 대처중반기가 넘어서면 처음 내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대처가 물러난 것도 대처주의에 충실한 추종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한 각료들의 반발이었습니다. 대처는 특히 당을 우리 편, 다른 편으로 가르는데, 각료들이 보고서를 올렸을 때 맘에 들지 않으면 빈 공간에 wet라고 적습니다. ‘믿을 수 없는 놈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처시대에 보수당 내 진영을 wet VS dry 라고 이야기 합니다. dry는 대처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을 의미할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대처주의의 정책적 내용이 블레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대처가 전후의 합의 정치에서 전격적으로 이탈해서 정치경제적 논의의 지평자체를 이전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했던 입법적 조치들인 민영화, 반노조입법, 복지개혁 등을 블레어가 대부분 수용합니다. 예컨대 노동운동에서 1979년에 TUC의 109개 노조가 가입했었고 1,200만 노조원, 노조조직률 50%, 단체협상적용률 75%에 달하는데 대처가 끝나면서부터 블레어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 통계가 무엇이냐면 2005년 통계로 TUC의 가입노조원수가 1,200만에서 600만정도로 반수가 줄었고, 조직률이 50%에서 28%로 줄었고, 단체협상적용률 75%에서 35%로 반 이상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처주의가 만든 영국정치의 지형입니다.

블레어의 노동당과 클린턴의 민주당

블레어의 제3의길을 얘기할 때 반드시 얘기해야하는 것은 클린턴의 신민주당과의 관계입니다. 블레어는 영국 노동당의 모습을 유럽 사민주의에서 모방하려하지 않고 대서양 건너 미국정치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비극인데 미국은 최대의 아동빈곤국이고 복지국가로 분리 되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80년대 레이건, 대처가 대서양 양안에 신자유주의의 담론과 정치를 주도했는데, 대처의 가장 확실한 유산이 노동당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라면 레이건의 확실한 유산은 민주당을 변화시킨 것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어쨌듯 영국 노동당이 미국의 민주당을 모델링했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인데 미국의 민주당은 소위 사민주의라고 이름 붙일만한 정책을 펼쳐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992년에 클린턴이 등장하는데 12년 동안 공화당에게 정권을 내줬으므로 이때가 되면 민주당의 선거패배에 대해 여러 가지 요인 분석을 하게 됩니다. 민주당이 72년에 닉슨과 맥가번의 대결에서 맥가번이 형편없이 패하고 84년 선거에서도 레이건과 월터 먼데일의 대결에서 패하고 88년에 조지 부시 시니어와 마이클 두카키스의 대결에서 패하는데 이때 당시 실패한 후보들은 모두 자유주의(유럽으로 치자면 사민주의적인)적인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민주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가 너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당낸 자성의 목소리가 많아지게 됩니다. 클린턴은 상당히 우익적인 사람입니다. 예컨대 85년에 먼데일이 레이건에게 패하고 나서 민주당의 보수정치인들이 데모크라틱 리더쉽 카운실(DLC)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이 조직은 선거패배의 원인을 급진적 정책에서 찾고 따라서 이는 결국 부자와 백인의 호의를 얻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지속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흑인들로부터 거리두기를 전략을 펼칩니다. 클린턴은 DLC 창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주당은 사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라든가 존슨시절의 시민권 혁명과 같은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정당입니다. 하지만 클린턴은 이런 것으로부터 전면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의료개혁, AFDC-1935년에 루즈벨트의 사회보장법에서 시작한 것으로 아이를 가진 편모를 대상으로 한 사회권으로서의 사회부조였지만 클린턴이 수혜기간 5년설정(연속 2년 이상 금지), 책임을 연방에서 주정부로, 수혜자는 공원청소와 같은 공공근로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하는 형태로 개혁–의 사실상 폐지 등이 보여줍니다. 이러한 클린턴 정부에서 만들어낸 근로복지 개념이 영국 노동당 제3의길의 핵심인 일하는 복지에 차용된 것입니다. 96년에 이러한 새 법안에 클린턴이 서명을 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제 미국에서는 우리가 알아왔던 대로의 복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민주당의 정책이 노동당의 welfare to work에 반영된 것입니다. 대처랑 클린턴을 볼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복지를 자본주의 구조, 경제적 문제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빈곤의 문화담론 같은 것이 융성하게 되면서 의존문화에 대한 질타를 공개적으로 하고 under class-계급 밖의 계급, 복지 의존자, 없어져야할 계급-로 낙인 시키고, 공동체주의-공동체 붕괴의 원인을 복지 의존자들에게 묻는-의 해체원인으로 몰아넣는 등 행위들을 통해 비난의 정치, 책임전가의 정치라는 여러 오명들을 얻게 되기도 했습니다. 복지의 문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시장질서가 낳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소하기 보다는 문화의 문제로 보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복지수혜자에게 돌린 것입니다. 블레어는 절대적인 클린턴주의자였습니다. 1992년에 영국이 총선에서 4번째로 패하고 클린턴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 이후에 블레어와 골든 브라운이 굉장히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합니다. 때로는 클린턴을 만나러, 때로는 클린턴 주변 인사를 만나러, 때로는 기업가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방문합니다. 97년에 블레어가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그 전인 96년에는 블레어가 국가손님으로 공식 초대를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두 지도자가 굉장히 친밀한 사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에 대해 영국의 중도좌파 신문이 가디언은 “두 사람은 마치 태어날 때 분리된 쌍둥이처럼 대화를 나눴다.” 라는 촌평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노동당과 민주당이 모두 일련의 선거 패배를 경험했으므로 블레어로서는 민주당 클린턴의 승리에 작동했던 전략을 교환하고 학습하고 정책으로서는 복지, 범죄에 관해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등 중간 계급의 지지를 유발하여 선거승리를 야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한 것입니다.

1994년 7월에 블레어가 노동당수의 선거운동을 할 때 복지의존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하고 workfare를 공식적으로 주창합니다. 일과 복지는 함께 간다는 것이고 고용이 최상의 복지라는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상당히 공격적이고 반복지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함께 이듬해 95년 특별당대회에서 조항4를 폐기합니다. 97년 집권 후에는 바로 재무상이었던 골든 브라운이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알렌 그윈스킨 FRB의장을 만나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데 뱅크 오브 잉글랜드를 독립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한 나라의 통화정책에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중앙은행에는 어디에나 보수적인 금융론자, 즉 통화주의자들이 집결해있습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자율를 높이거나 낮추지 않을 수 있을까, 통화량을 통제해서 자국의 화폐가치를 유지할까’입니다. 헌데 이는 복지국가의 기본정신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좌파정권이라면 한 나라의 재정정책뿐만 아니라 금융정책 자체를 주도해야하는데 영국에서 마침내 블레어 정권이 중앙은행을 독립시켰다는 것은 정책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선거 승리 이후에도 블레어와 클린턴의 관계는 지속되는데 블레어가 수상이 되자 클린턴이 즉각 방문을 하고 다시 블레어가 기딘스와 같은 지식인들을 대동하여 답방하고, 그러면서 영국과 미국의 중도좌파 정당모임 같은 것도 제안되는 등 깊은 관계가 지속됩니다.

 

노동당 당정책결정과정의 변화

노동당의 정책구조를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는데 변화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당정책과정을 민주화시키고 확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80년대에 진행되다가 블레어에 의해서 확대되는데 1man 1vote 즉, 1인 1투표제를 도입합니다. 이는 지구당 같은 경우에는 80년대 말까지 사실상 당의 중간간부들, 즉 활동가들이 좌지우지 했는데 그것을 당의 일반당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형태인 것입니다. 활동가 같은 경우 이념성향이 강한데 일반당원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이념적 성향을 약화시키고 노조의 경우 소위 블록투표, 즉 위원장의 의견에 집단투표를 해왔었는데 이를 폐지하고 일반 당원의 목소리를 키움으로써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노동당이 노조 위원장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차단하며, 당수나 부당수를 뽑을 때 선거인단을 구성하는데 여기에 노조 지분을 낮추고, 노조의 재정적 영향력을 50%이하로 낮추고 기업으로 채우면서 자신의 제3의길을 펼쳐나가는 기반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제3의길이 노동당 하나의 당 이념, 정책으로 등장하고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노동당에서 발원해서 유럽대륙으로 퍼지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배경인 것입니다.

제3의길의 성취

블레어 시대에 와서 국유화 포기하고 누진세와 공공지출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거기에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 무엇이 남았느냐,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3의길의 새로운 타협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예산적자, 긴축이라는 것이 큰 쟁점인데, 예산적자는 감세가 아닌 복지예산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복지예산이 늘어난 원인은 복지사기꾼, underclass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실업이 증가하고 기업과 자본에 대한 감세가 만든 예산적자를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닌 복지국가의 위기로 전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당의 정책목표는 적자를 감소한다는 것, 긴축하다는 것은 균형예산을 실현한다는 것이고 이는 공공예산을 삭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용증가를 하지만 과거의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투자를 증가시키고 고용과 성장을 이뤄내는 맥락이 아닌 사회투자국가의 맥락, 즉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훈련과 재교육을 통해서 노동시장으로 재진입시킴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는 훈련받는 기간에 상당한 정도의 소비적 복지를 국가가 부담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사업장을 몇 차례이상 거부할 수 있고 직장으로 인해 이사를 해야 할 경우 이사비용을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모습이 아닌 강제적으로 참여시키는 훈련을 받거나 아니면 급부를 포기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소극적인 노동정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업자들의 복지혜택조건을 까다롭고 수치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국가에서 소개하는 사업장에 갈 수밖에 없고 저임금수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제3의길에 대한 평가

제3의길이 주창되면서 시장은 단순히 수용되는 곳이 아닌 환영되어야 할 곳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민주의로 여겨지는 내용들-국유화, 조세를 통한 재분배-이 포기되어 집니다. 사회투자국가 개념도 생산적 복지, 근로복지를 다루고 있는 개념이고 복지가 생산과 고용, 경쟁력과 효율을 강조하는 실체일 뿐입니다. 이런 것을 도외시할 수 없겠지만 이런 것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소비적 복지를 통한 안정망, 탈상품적 요소들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3의길이 무차별적으로 다른 나라에 전이되고 한국 같은 나라에서 채용하는 것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제3의길을 수용하면서 실업과 빈곤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저임노동자에 대한 가계조사를 강화하면서 개인들을 또 저임노동으로 몰아넣은 악순환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과거의 사회보장국가가 제3의길을 통해서 사회투자국가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선진개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복지국가의 형성자체가 사회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권력자원의 비례률이 어떻게 교우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의 균형점이 쉽게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이 복지국가도 아니면서 복지국가를 공격하는 이유는 복지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권력자원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를 반대하는 기득권층의 목소리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복지국가가 아닌 미국,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복지국가 위기론이 가장 힘 있게 주장되는 이유는 힘의 추가 기울어져 있는 측, 반복지담론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브레이스 같은 사람이 복지국가 위기론에 대해 “복지국가 위기론은 다름 아닌 부자들의 반란이다.”라고 규정하는 모습은 깊은 통찰력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제3의길과 한국

지난 일백여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영국 노동당이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화에는 성공했지만, 사민주의의 일반적 위상과 유럽 대륙국가들의 상대적 성취들에 비춰보면 과연 그것이 성공적인 정치화였는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수권정당으로서 영국노동당의 정치적 지위가 확립된 지 거의 90년이 지난 오늘날, 특히 80년대 이후 노조조직률, 노동당에서 노조가 행사하는 제도적인 영향력과 지분, 영국 노동당의 법적 위상, 노조운동에 대한 사회적 위상 또한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대륙의 선진 복지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영국의 정치적 산업적 노동운동이 처한 열악한 상황은 두드러집니다. 정치제도, 정당정치의 전통, 노동운동의 역사와 정치화 시점, 노동운동 안 밖의 여건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주의 담론과 관행의 사회적 위상, 엘리트 특히 진보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들 등의 허다한 조건들의 차이로 인해 영국노동당의 경험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화 혹은 진보진영의 역사적 과제 등을 직접적으로 추출하는 것은 부질없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단지 영국 노동당의 경험을 하나의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삼아 조심스럽고도 진지하게 한국진보정치의 앞날을 성찰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수권정당으로 자리 잡기까지 구조적 역사적으로 험난한 조건들뿐 아니라 수많은 돌출적인 사건과 우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결정적인 시기마다 그것을 포착해서 전향적으로 활용하는 즉, 이론에 기대어 역사의 흐름을 지래 예단하거나 정당을 냉소하거나 과도하게 낙관하지 않는 진보엘리트들, 지식인, 정치인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결연한 자기희생이 있었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이 여전히 당이라면 우리가 영국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그 점일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데올로기 스팩트럼의 맥락에서 과거의 중도 혹은 합의가 그나마 수정된 좌파로 불릴 수 있다면 지금의 새로운 제3의길에 대해에서는 많이 양보해서 수정된 우파정도의 평가정도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실정을 참고 할 때 제3의길 조차 신자유주의가 그렇듯이 복지국가, 노동운동, 노동당, 케인즈주의 등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이후에 등장한 역사적 개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복지국가 위기론, 세계화된 담론이 융성한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축적된 제도적 유산과 그에 따른 방대한 수혜자 그룹, 그리고 한 세기 넘게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틀이 일거에 무시되지 않는 한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사민주의의 재편조차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은 정치적 수사로 포장되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완강합니다. 이런 토양에 제3의길을 한국적 현실에 무작정 차양하는 신중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가령 기왕에도 소비적 복지가 노동의 직접적 탈상품화 효과 이외에 총수요증가, 안정과 신뢰증진, 생산성증가, 성장과 고용의 기여 등 경쟁력과 생산을 위한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마당에 구태어 제3의길과 이를 위한 복지가 주된 내용으로 제시하는 훈련담론에 기초한 경쟁력 접근들이 한국사회에서 부상하는 것은 다소 기이한 일입니다. 그것은 첫째, 시장실패 곧 자본주의의 체제적인 문제를 희생자의 기술문제로 전가하는 문제가 있고, 둘째, 미국 등에서 고숙련 실업자가 존재하는 것을 보며 알 수 있듯이 시장의 불확실성속에서 무슨 훈련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셋째, 훈련비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실업보호 등 전통적으로 마땅히 지불해야하는 소비적 복지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고, 넷째, 훈련비용을 위한 재원조달 자체도 쉽지 않은 문제이며, 다섯째, 고기술과 서비스부분이 전통적 제조업으로부터의 탈락자들을 적절히 흡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된 정책과제들은 무엇보다 소비적 복지의 최소한의 구축이고 그 이후에 추가적으로 동원되어야 할 것들일 것이고, 소비적 복지의 수준이 OECD 최저수준인 한국의 형편에서 거론하기도 민망한 개념들입니다. 독일과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고생산성 전략은 방대한 소비적 복지, 보편적 복지 안정망 내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3의길과 관련해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 오늘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이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펼치는 보편적 혹은 소비적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권력, 집권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텐데요.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 민주당은 생각이 없는 정당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노동당의 제3의길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지난주에 한국에서 무엇을 바꿔야 할까라는 고민에 제도를 바꿔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도를 바꾸려면 법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의회권력을 가져야 할 것이고 한국의 민주당은 생각이 없는 정당이니까 새누리당 박근혜정부에게 자비를 구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하니 허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무엇을 해야하고 어떤 활로를 가져야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민주당이 진보라고 할만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안마다 지지가 가능하니까 어쩌면 편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한 나라의 복지수준은 힘의 싸움의 결과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 권력의 균형점이 어디있느냐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복지가 열악한 상황에 비춰보면 노동,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력자원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상당히 답답한 것 같지만 한 쪽으로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약자들이 집단적으로 혹은 계급적으로 연대, 결속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의회에 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사 쉽지 않은 길이라도 변함없는 목표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사이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도가 부실할때는 인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심상정, 노회찬 같은 사람들이 한 개인으로서 국회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 같은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도가 부재할 때 제도를 만들기 위해 뛰어난 엘리트들이 의회에 들어가는 점도 있지만 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제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개인들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진보정치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점은 사람을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세력을 키워낼 수는 없어도 사람은 키워낼 수 있거든요. 저는 그것에 별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Q. 선생님께서 제3의 길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 일변도 아닌가 생각됩니다. 비판이 균형을 잡으려면 제3의 길이라는 노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여건까지도 보아야 되는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영국사회의 사회경제적인 환경의 변화, 예를 들면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의 산업구조 변화, 이에 따른 노조의 영향력 감소, 세계화 등의 산업구조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노선을 시도하는 것 아닌가, 이런 현실내재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어쨌든 그러한 변화가 18년 만에 선거 승리를 가져왔는데 그것의 현실적인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3의길에 대한 좌파노선에 입각한 일방적 비판이 어떤 현실적인 유효성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블레어가 정권을 잡고 제3의길을 펼치면서 영국 노동당의 운영행태, 오퍼레이션 상의 변화, 혁신 등이 어떤 것들이 더 있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제가 제3의길을 비판적으로 보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3의길을 호의적으로 보기 때문에 비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은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최소한 사민주의의 가치, 가치추구를 위한 권력적 수단들을 염두에 두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노동당이 블레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운동의 정치화는 성공했지만 이것이 성공적인 정치화 였느냐에 대해서는 점차 회의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기저층을 자꾸 이반시킨다는 측면, 그래서 권력적 수단자체가 사민주의적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고, 사회주의의 본래 정신에 비추어서 생산수단의 국유화, 공공소유도 포기하고 복지국가의 기본원리인 조세지출의 논리를 포기했다면 노동당을 사민주의 정당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굉장히 강화되면서 복지국가 위기론이 거론되기 시작하고, 합의의 정치가 무너진 복지국가의 위기가 주도적인 시대의 담론으로 부상하는 이 상황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케인즈주의 합의의 논리가 생산과 분배를 완전히 인위적으로 절연시키면서 오로지 시장이 생산한 것을 국가가 재분배하는 것에만 만족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분배조차도 시장의 역할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민주의가 회생하려면 추상적이긴 하지만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경제민주화 같은 자본의 생산과정 자체에 대한 민주화를 통한 통제와 같은 것을 곁들이지 않으면 자본의 공세에 취약하게 노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거승리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재인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복지국가에 관해서 정도의 문제로는 박근혜대통령보다 나은 정치를 펼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질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민주당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민주당을 욕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선거의 승리자체도 크게 평가 해야하지만 승리해서 뭘 한건데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선거패인분석을 할 때 위에서는 계급구조문제를 중요시합니다. 예컨대 산업구조, 고용구조, 교육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구태의연한 좌파의 이념과 가치를 내걸고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는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보쪽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계급구조의 문제보다는 계급형성문제를 주목합니다. 이는 계급이 객관적으로 구조화되기보다는 정치 혹은 진보세력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지지하지 않는 것은 계급구조의 변화 문제가 아니라 진보정치의 역할 부재로 인해 계급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계급구조, 산업구조가 다 비슷한데 왜 복지국가 수준이 다르고, 왜 계급의 결속력이 다르고, 계급의식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진보는 정치의 책임을 스스로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진보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노동당 운영의 변화는 말씀드렸던 것 정도일 것 같습니다.

 

Q. 저는 사민주의와 협동조합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사민당의 오랜 집권을 통해서 사민주의에 대한 가치의 깊이가 상당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영국의 경우 노동당이 표를 찾아가는 인기영합적 정당으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일이나 스웨덴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부탁드립니다.

A. 저의 기본입장은 자본주의의 문제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대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민주의는 국가가 중심적인 행위자 일테고, 협동조합은 지극히 부분적 역사적으로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역시 민간의 역할인 만큼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Q. 보통 복지국가 이야기를 할 때 스웨덴을 많이 얘기하는데요. 하지만 스웨덴과 대한민국은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이 매우 다릅니다. 일차적으로 한국은 기득권이 기득권 유지에만 욕망이 앞서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부터가 다르고 학제간-정부부처간 등의 협력 실종 즉, 서로를 상대방을 용인하고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스웨덴을 이야기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A. 북유럽과 사회문제적 배경은 물론 다릅니다. 저는 문화라는 말은 모호한데 이를 변화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를 변화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핵심이 무엇이냐? 내려놓지 않으면 내려놓게 만드는 것이지요. 힘은 힘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문화로 이해할 때 기독교 문화, 노블리스 오블리제 등 복잡한데, 기본적으로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자체가 세속화로 인해 윤리적으로 서유럽사회에 근근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이 있을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사람을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힘밖에 없는 것이지요. 가진 사람은 결코 자발적으로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주의적 가정일 것입니다.

 

Q. 지금 새로 노동당의 당수가 된 에드워드 밀리밴드가 갖고 있는 정책, 이 정책이 보수당을 이기고 다음 총선에서 집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수상도 처음에 등장할 때에는 영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시장자유주의적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에 비해 밀리밴드는 훨씬 나은 정치를 펼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국의 제3의길이 진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3의길과 과거의 케인즈주의의 합의점에 대한 전략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현재 노동당 현역 의원들이 제3의길과 거리두기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밀리밴드가 정권을 잡게 되면 훨씬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영국이 그 정도 기반이 있는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저는 아직 선거권도 없고 정당에 가입할 수 없는 미성년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진보세력이 인물을 못 키운 것이 패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돌아가신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것을 패착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물보다는 한국 국민들의 정서나 감정들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인한 레드컴플렉스로 인해 진보정당이 진보적 색깔을 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A. 물론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진보는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여건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이야기는 인물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물마저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인물은 중요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방금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해줄만한 집단적인 세력이 없어서 였는지는 몰라도 진보라고 이름붙이기는 어려운 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